삶은 고통이다. 그리고 난 그걸 즐기기로 했다
방황과 선택과 두려움, 그리고 믿음에 대한 이야기
들어가며
두번째 프로젝트를 실패하며 나는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져버렸다.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패의 타격은 이틀정도밖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작년 말에 경험했던 끝없는 방황을 다시한번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그토록 시커먼 늪으로 끌어당긴 것일까? 그것은 실패에 대한 허무함보다는 이제 바라보고 가야할 곳을 잃은 상실감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는 나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두려움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이 두려움과 마주하기로 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두려움과 맞써며 오히려 난 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보다는 믿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할 일들이 생겼고 나는 또 한번 성장하게 되었다. 오늘은 이것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난 이제 뭐하지?
사실 실패 후에 많은 생각들을 했다. 왜 실패한거지? 뭘 바꿔야 하지? 내가 어떤 게 부족한거지? 그런 생각들… 그러다 이윽고 따라오는 생각 “그래서 난 이제 뭘 해야하지?” 사실 답이 이미 있긴 했다. 두번째 프로젝트전에 프로젝트 3개 4개 정도를 리스트업을 해놨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 what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다만 무작정 서비스만 개발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걸 알아버렸기에 how에 대한 고민에 가까웠다.
여러가지를 생각을 하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이건 이래서 문제가 있고 저건 저래서 안될거 같고 요건 될거는 같은데 돈은 못벌거 같았다. 그렇게 생각은 두려움을 낳았다. 그리고 두려움은 계획 하나씩을 밟아나가고 있었고 남아있는 것이 없자 점차 상실감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생각이 키운 두려움에 잡아먹히고만다.
내 일을 찾기 위해 서점에 가서 창업, 마케팅, 브랜딩 관련 책들을 잔뜩 사서 보게 된다. 그리고 창업 관련 유투브 영상, 비즈니스 유투버들, 무자본 창업 관련 영상들, 북튜버 영상들 쭉 훑어보면서 몇십만원 짜리 강의까지 결제해서 들었다. 나는 길을 찾고 싶었고 아직 길을 못 찾는 이유가 인풋이 적어서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이 있으면 그것들을 조합해서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무지성으로 잔뜩 집어넣어버린 댓가는 오히려 더 심각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지식이라는 것은 숙성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다른 지식들과 조화가 되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하는 것인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습득한 이 지식과 정보들이 오히려 선택을 더 어렵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템은 저 지식으로 인해서 잘 안될거 같고 이런 아이템은 이런 정보에 의해 잘 안될거 같고 심지어는 책의 내용들끼리 충돌하여서 어떤 책은 A가 중요하다 어떤 영상은 A같은건 의미가 없다. 이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 더욱 큰 혼란만 가져오고 결국 난 더더욱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지식의 저주에 걸린 것이다.
나는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었나?
결국은 두려움이었다. 4개 5개의 아이템을 도출해놓고도 나는 그것들을 진행하기 두려웠다. 생각이 많아지다보다 안 될 이유들만 계속 쌓여갔다. 이대로라면 뭘 선택하든 문제가 생길거 같았다. 더군다나 가지고 있는 자금은 이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계산을 대충 해보면 세번째 프로젝트를 여엉부영 몇개월하다 실패할 경우 그떄부터는 진짜 자금압박에 몰릴게 분명해보였다.
선택이 너무 두렵다보면 인간은 이상하게도 가장 리스크가 큰 옵션을 선택하는 이상한 편향이 있다. 그 옵션은 바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옵션이다. 그렇게 방바닥에 널부러져 유투브만 보다 시간이 흘러가는 어느날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여행도 가고 책 읽고 글을 계속 써도 아무것도 선택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워졌다. 나는 여기서 끝이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상태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힌트를 하나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청의 강의에서 였는데 뭐… 자청이 무자본 창업을 이렇게 저렇게 합니다 같은 방법론적인 파트는 뭐 딱히 감흥이 없었는데 가장 깨달음을 얻은 부분은 레벨이론이라는 것이었다. 자청은 본인이 사업을 처음하고 레벨이 낮다면 길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것 부터 시작할것이라고 했다. 예전부터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완전 똑같은 것을 파는데 어떤 사람은 엄청나게 잘 파는데 어떤 사람은 파리만 날리는 것이다. 난 잘 파는 사람에게 특별한 테크닉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잘 파는 사람이 레벨이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레벨은 어떠한가. 두번의 실패로 나는 나의 레벨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의 레벨은 바닥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하려고 했던 것들은 상당히 복잡하고 거대한 것들이었다. 메이플로 치면 초보자 사냥터에서 달팽이를 잡고 있어야 할 사람이 던전에 들어가서 발록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파구를 찾는 또 하나의 힌트를 얻게된다. 바로 “영감수업”이라는 유투브 체널의 영상들을 보면서 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 “영감수업”이라는 체널의 주요 내용은 이런것이다. “자기다운 삶을 살자”,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 “일단 하자, 하고나면 수습된다”, “자신을 믿자” 뭐 그런 내용이다. 요약만 보면 싸구려 힐링체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당히 좋은 인사이트들이 많이 담겨있다.
이 두가지 힌트를 조합해보니 지난 두번의 실패의 진짜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고 왜 내가 생각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못하고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두번의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끊임없는 의심과 자기 자신을 믿지 않아서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하면 나는 시장 반응을 잘 살피지 않고 개발기간이 길어지고 경쟁제품이 더 월등했기 때문이 아니다. 레벨이 낮았기 때문에 중간 결과물들이 맘에 들지 않았고 이것들을 개선시켜 더 좋게 만들고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내가 개발을 하면서도 이 코드가 과연 맞는 코드인지 의심했고 내 디자인 감각으로 이런 UI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의심했고 유저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지 의심했고 내 서비스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의심했다. 그리고 개발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생각은 더욱 진해졌다. 그럴떄마다 이거 계속해야하나 싶었다. 살면서 뭔가를 제대로 끝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끝을 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의심이 되지만 억지로 끌고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첫번째 프로젝트 당시 내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어려워하고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핑계로 실패로 결론내린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프로젝트에서는 비슷한 컨셉의 경쟁제품을 보고 이걸 핑계로 실패로 결론내린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때까지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원인이 아니라 내가 찾고 싶은 내가 바라고 있던 핑계였다. 알게 모르게 나는 나 자신과 내 프로젝트에 의심을 하고 무의식 중에 항상 이것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실패를 해야 나의 의심이 맞았다는 것에 안심하게 되고 불안함이 사라지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마저 전부 포기하게 된 것이다. 사실은 그것마저 두려웠다. 내가 믿지못하고 별로라고 생각하는 서비스를 사람들이 사용하고 보이는 반응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런 반응들과 함께 돈을 못 벌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의심을 더욱 증폭시켜서 내가 스스로 나의 프로젝트를 실패하길 바라는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다.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나의 두려움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편이었다. 대학 4학년 때 학부생치고는 꽤 좋은 논문을 저널에 게제하고 5G 관련 국가연구과제에 참여해서 모바일 엣지 컴퓨팅 연구를 하면서 컨테이너 기술 분석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컨퍼런스에서 발표도 하고 급격히 성장하는 개발자 커뮤니티를 운영하기도 하면서 외부로부터 유망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놀랍게도 그 당시 나의 고민은 “내가 이정도 능력으로 직업이란 것을 가질 수 있을까?”였다. 내가 이룬 성과들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품일 것이라 의심했던 것이다.
두 번의 직장생활에서도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과연 진짜 이 회사에 필요한 존재일까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동시에 누군가 그것을 확인시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에 대한 믿음을 타인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믿게 만들기 위해 나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를 했다. 당연히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창업을 하기 직전에 나의 멘토 중 하나인 바른엔터테인먼트의 김대진 대표님에게 너무 두렵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실패하더라도 내가 돌아갈곳이 되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또다시 나에 대한 믿음을 타인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그렇게 창업을 하고 나서도 “이게 되는거 맞나?”하면서 일주일에 7번은 검증이란 핑계로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자청의 강의와 영감수업의 영상으로 두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내가 레벨이 낮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낮은 레벨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레벨을 높히자
- 아무도 날 맏어주지 않으니 나라도 나를 믿어주면 안될까
특히 영감수업에서 레릿의 말들은 상당히 가슴에 와닿았다. 그런 식의 내용어었다. “나는 이미 성공을 한 사람이고 지금은 그 과정을 다시 리플레이하는 것”, “뭐 잘 안되면 어때, 지금 내가 좋아하고 떨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게 뭔 상관이야”, “생각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니 이제는 생각을 그만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등등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영상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을 못 믿는게 아니라 안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냥 다히 특별한 이유 없이 나 자신을 믿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깊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확히 앞서 실패한 두개의 프로젝트에서 정확히 어떤 부분이 두려웠는지 무엇때문에 두려웠는지 그떄의 감정은 어땠는지 그냥 내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 어떤 반박이나 강압이나 한심하다는 생각이나 경멸의 눈대신 말이다. 그렇게 믿어주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들은 스스로의 이야기는 나 자신도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까지 담겨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믿어주기로 한 나는 “아 그게 무서웠구나.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런걸 두려워하는건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들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망설이고 있었던 이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대화를 했다. 그동안 고민만 하면서 안되는 이유만 생각했던 4~5개의 아이템들이 왜 안될거 같은지 뭐가 두려운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살표를 그린 후에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적었다. 가령 “나는 탁월한 능력이 없어서 이런 서비스를 할 때 고객이 불만족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에는 화살표를 그려서 “뭐가 문제야? 환불해주면 되지”라고 적거나 “투입시간 대비 돈을 잘 못 벌면 어쩌지?”라는 걱정에는 화살표를 그려서 “너 지금까지 1원도 못벌었어. 천원만 벌어도 지금까지 보다 잘한거야 그리고 그 투입시간 동안 배울 수 있는게 많지 않을까? 그렇게 해도 돈을 잘 못벌면 가격을 올려서 투입시간 대비 수익을 높히면 되지” 라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보니 내가 스스로 대답하지 못하는 걱정은 없었다. 답은 나에게 다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전에는 이런 답을 찾지 못하고 걱정만 했을까?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이걸 해결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 였다. 믿는 순간 해답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우주 최강 무적의 해결방법이 있었다. “아니 이거 해결못하면 어때? 재밌게 했으면 된거 아냐? 재밌게 하고 재밌게 실패한 스토리를 팔면 되지 이력서에 몇줄 더 추가 되겠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나를 믿어주기로 한건데 오히려 나는 믿어주기로 하니까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 나와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나와 같이 하루하루 발전되는 모습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 유투브 체널을 구독하는 이 글을 쓰는 현재 단 한명의 나와 함께하고자 하는 구독자분 이 모두가 나를 믿어주고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치며
사람들은 종종 믿음과 기대를 혼동한다. 이거는 망할 놈의 시크릿과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신앙 때문인거 같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올해 안에 월 천만원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그리고는 그것을 위해 노력도 하고 백번쓰기 같은 것도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은 그 해에 월 삼백만원 밖에 벌지 못했다면 인간이라면 실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것은 스스로가 믿음을 저버린 것인가? 스스로에게 배신당한 것인가? 이것은 믿음의 차원이 아닌 기대의 차원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나는 월 천만원 벌 수 있다고 기대해”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을 믿어주기로 하고나서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가 바로 이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니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강박이 있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그리고 현실은 시궁창이란걸 확인하고 이 괴리감때문에 스스로를 더 못 믿게 되고 못믿으니까 더 압박하면서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때문에 충족을 못하면 스스로를 의심하고 악몽의 굴레였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나는 올해 안에 월 천만원 벌 거야”가 아니라 “나는 올해 안에 월 천만원 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 근데 딱히 지금 그 능력이 없어도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그련데 그렇게 해서 올해 안에 월 천만원을 못 벌어도 괜찮아. 뭐 그거 못 벌면 어때. 난 월 천만원 못 벌어도 나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믿거든” 같은 식이다. 이걸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냥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인드는 내 삶을 단 일주일만에 뒤집었다. 나는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아니라 그걸 못해도 문제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게 진짜 내 모습 자체로 믿어주는 것이니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과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방식대로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당신은 당신을 믿는가? 당신의 삶을 믿는가? 혹시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대이지 않을까? 스스로와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존중해주고 믿어주기로 한다면 누군가 나를 믿어주기전에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나의 존재자체를 믿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